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설렌다.
그 누군가가 그리움의 대상이라면 더욱 그렇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때와 시를 알 순 없으나, 오시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사람'(Waiter)이다.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다. 만남을 준비하는 기다림이다.
성경은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 매일의 일상에서 예수님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기다림은 허비가 아닌 채비의 시간이다.
기다림을 거룩함으로 채워야 한다.
거룩은 '하기오스'다. 이 말은 본래 하나님께만 어울리는 단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도 거룩의 권한을 위임하신다.
거룩은 성도의 선택이 아닌 의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나의 거룩을 요구한다.
우리의 거룩은 모든 일상과 행동양식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즉, 구분이나 단절이 아닌 '구별'을 의미한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거룩은 드러난다.
거룩은 '나는 자연인이다' 윤택처럼 사는 게 아니다.
거룩은 'Bewhy'처럼 사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은 어렵다.
거룩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힘이 '보혈'에 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묻어 있는 자들은 '자동 구별'이 가능하다.
나도 알고, 세상도 안다. 보혈 샤워는 자주 할수록 좋다.
피는 곧 생명이다. 헌혈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예수님의 헌혈은 영원 효력이다. 누구나 그 피를 수혈하면 산다. 예수 피 수혈 방법은 간단하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벧전 1:21)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가사에 보면,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는 표현이 있다.
과연 그런가? 당연히 아니다. 영원한 건 절대 있다!
하나님, 그 분의 말씀, 그리고 그 나라.
모든 게 끝나는 순간이 온다.
근데,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이야말로 모든 게 새로 시작되는 지점이다.
영원의 시계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다.
다만, 영원을 사는 자들과 그들의 자리가 다를 뿐이다.
영생이 있고, 영벌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항상 있고,
영원하다.
그 말씀이 곧 복음이며,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영원한 죽음이 있다.
영원의 생사 기로는
예수님에 의해 갈린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는 게 창조의 질서다.
모든 육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러나 창조주는 영원히 계신다.
그 분의 말씀도 영원하다.
예수님은 죽음 정복자다.
예수님은 숙명 지배자다.
문득, 짐 앨리엇의 고백이 뇌리를 스친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예수님의 선물은 영생이다.
생명도 감사한데, 영원하기까지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영생을 터부시한다.
그리스도인들조차 영생을 오해하거나 불신하고 있다. 비현실적이라서 그렇다.
교회의 사명이 복음 증거에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영생이 누락된 복음 증거는 모순이다.
예수님은 그냥 생명 주러 오신 게 아니라, 풍성한 생명, 영원한 생명 주러 오셨다.
풍생 소유자, 영생 소유자는
지금 여기의 결핍과 한계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
이미 가질 건 다 가진 자들이다.
오히려 영원 부심으로 상황 돌파, 한계 극복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영원을 끌어다가 오늘이라는 시간에 적용하신다.
오늘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나는 오늘을 사는 동시에 영원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